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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조 충무공(忠武公) 영무(英茂, 1338~1414)]
개국·정사·좌명공신으로 장생전에 화상 걸어
무인으로 문치에도 기여하고 태종묘정에 배향

자는 건야(乾也), 호는 퇴촌(退村)·휴암(休巖).
1369년(공민왕 18) 요경과(遼慶科)에 급제, 산원(散員)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낭장(郎將), 철원부사(鐵原府使),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1390년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을 때 충정공〔忠靖公, , 휘 인옥(仁沃)〕의 천거로 이성계의 창업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1392년 이방의(李芳毅), 배극렴(裵克廉)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한 공으로 개국(開國) 삼등공신에 책록되었고 태조가 장생전〔長生殿, 기린각(麒麟閣)이라고도 함)에 공의 화상(畵像)을 그려 걸어서 영구히 기념토록 하였다.
위로 3대에 벼슬을 증직하고 아들 5형제에게 벼슬을 주고 본처가 낳은 장자(嫡長)에게는 영원토록 벼슬이 세습되고 죄가 있어도 사면토록 하였다. 하륜(河崙)과 함께 정도전(鄭道傳)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제정에 참여하고 관리의 고과법(告課法) 4개항과 지방수령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전최지목(殿最之目) 8개항을 세웠다.
신무(神武)한 담략이 있어 여러 차레 변방의 중임을 맡았는데 1394년 강계등처도병마절제사(江界等處都兵馬節制使)로 서북지역의 홍건적의 난을 토평하였다. 1398년(정종 1) 정도전, 남은 등이 태조의 계비(繼妃)인 강씨 소생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고 이에 불만이 있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를 죽이려 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안위가 경각에 있을 때 이화(李和), 조준(趙浚) 등과 함께 의를 따라 응기방책(應機方策)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하여 사직을 안정케 한 공으로 정사(定社) 일등공신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박포(朴苞)가 태조의 4자인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을 부추겨 대궐을 향해 군사를 일으킴에 하륜(河崙) 등과 태종을 도운 공으로 다음해에 좌명(佐命) 일등공신이 되었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병조전서(兵曹典書), 판공조사(判工曹事), 판형조사(判刑曹事),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우의정(右議政) 등을 지냈다.
공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이 문병을 위하여 장위(仗衛)까지 갖췄으나 이미 돌아 갔다는 말에 행차를 취소, 조정의 조회를 3일을 물리도록 명하였다. 빈소에 친림(親臨)하여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리고 태종묘(太宗廟)에 배향되었다.


[5세조 총관공(摠管公) 소생(小生)]
세습으로 4대 총관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 강릉도 존무사 이인임(李仁任) 등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숙부인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휘 돈(暾)〕과 4촌인 양렬공〔襄烈公, 휘 인벽(仁璧)〕이 항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불응하고 도주하였다.

[5세조 양렬공(襄烈公) 인벽(仁璧, 1328~1397)]
쌍성과 서경 회복·왜구격퇴, 문하찬성사로 선정
처남 이성계의 부름에 불사이군, 후학 육성 전념

호는 우계(愚溪)·해월정(海月亭).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를 도와 쌍성을,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서경(西京)을 회복하여 100년간 침범당했던 강토를 하루 아침에 다 수복한 공로로 호군(護軍)이 되고 1363년 김용(金鏞, * 주註) 토벌에 공을 세워 수복경성(收復京城) 이등공신이 되었다.
1372년 판사(判事)로서, 가주(家州)의 난동을 진압하여 만호(萬戶)가 되었고 안주(安州), 함주(咸州), 변주(邊州), 북청(北靑), 신주(信州), 옹진(雍津), 문화(文化), 삼척(三陟), 울진(蔚珍), 우계(羽溪), 영월(寧越), 안동(安東) 등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1378년(우왕 4)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火砲)제조기술을 가르치고 화포를 사용, 수군을 훈련시켜 왜구를 격퇴하고 강릉도(江陵道)의 상원수(上元帥)가 되었다.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선정(善政)을 펴는데 진력하고 동북면도체찰사(東北面都體察使)에 이어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 겸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가 된 뒤 유폐된 우왕을 찾아 향연을 베푸는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1389년(공양왕 1)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고 이듬해 회군(回軍)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조선 태조가 된 처남인 이성계의 개국(開國)을 예견하고 양양(襄陽)의 대포진 시상촌(柴桑村)으로 내려가 바다가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지어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고 시우(詩友)들과 도의를 벗하면서 태조 이성계의 삼징칠벽,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선비를 벼슬하라고 임금이 자주 부르던 일)에도 응하지 않은 채, 백의백립(白衣白笠)으로 살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굳게 지켰으므로 후세에 양양의 선비들이 공을 흠모하여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제사지냈다.
조선 개국 후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양절익위보리좌명공신(推誠亮節翊衛輔理佐命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영경연사(領經筵事) 한산백(漢山伯)에 증직(贈職)되고 양렬(襄烈)의 시호를 받았다.
문무(文武)를 겸해 도연명(陶淵明)의 시(詩)를 좋아하였고, 장한 충절(忠節)은 고려말의 삼은(三隱)과 나란히 하였다. 특히 정몽주(鄭夢周)와는 7년이나 년상이었지만 외적(外敵)을 격퇴하는데도 내치(內治)와 외교에서 또한 시우(詩友)로서도 생사고락을 같이 한 막역한 사이였다.
묘는 개풍군 흥교면 사곶리에 있고, 양양 동명서원(東溟書院)에 제향되었다. 첫 부인 하동(河東) 정씨(鄭氏, 1326~1358)와는 양절공(良節公)과 1녀를, 후 부인 정화공주〔貞和公主, 환조(桓祖)로 추존(追尊)된 이자춘(李子春)의 따님, 1345~1409)와는 양경공(良敬公) 등 6자 2녀를 두었고 정화공주의 묘는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에 있다.
 

주(註) 김용(金鏞, ?~1363)은 고려 후기의 부원(附元) 세력가로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총병관(摠兵管)으로 이를 방어하고 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었다. 공민왕(1351~1374)이 국권회복정책을 강력히 시행할 때 공민왕의 왕권강화와 반원정책에 반발하여, 고려조정에서 죄를 짓고 원(元)으로 도망간 최유(崔濡)와 원 왕실의 외척인 기씨(奇氏) 일당과 내통, 홍건적 격퇴 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았던 흥왕사(興王寺)를 습격하여 공민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이 때 원의 순종(順宗)은 공민왕을 폐하고 당시 원에 가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최유에게 1만 병력을 주어 고려를 침범케 하였으나 최유의 군이 정주(定州)에서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조인벽(趙仁璧)에게 패하여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의 복위를 알리고 그를 고려로 잡아 보내 죄인으로 죽게 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원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5세조 검찬성공(檢贊成公) 인경(仁瓊)]
검찬성을 지냈다. 후손이 없다.

[5세조 검한성공(檢漢城公) 인규(仁珪)]
고려조에서 검 한성부윤
조선에서 불사이군 절의

고려 충숙왕 때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워 벼슬이 검한성부윤(檢漢城府尹)에 이르렀다. 고려말 신흥 사대부들이 권문세족에 대한 개혁을 추구할 때 이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위화도 회군에는 아들 순(純)과 함께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節義)를 지켜 함안(咸安)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제천 검한사(檢漢祠)에서 해마다 시제를 지내고 있다.

[5세조 충정공(忠靖公) 인옥(仁沃, 1347~1396)]
전제개혁·척불숭유, 조선개국 일등공신
향년 50 큰 뜻 못 편 아쉬움, 태조묘 배향

자는 군계(君啓).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고 태조가 왕이 되기 전, 함께 어울릴 적에 공(公)이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과 더불어 통감(通鑑)을 강의하였다. 위화도 회군 공신으로 척불숭유(斥佛崇儒)와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적극 지지하여 신진세력의 기반구축에 기여하였다.
139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조선개국에 태조를 도와 원훈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元勳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에 책록되고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올랐다. 태조가 군신(群臣)들에게 「만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대업을 이루었으리요.」하여 공의 대공(大功)을 찬양하였다. 공은 재주가 뛰어났고 풍채가 훤칠하여 엄숙하고 정중히 있으면 사람들이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보거나 함부로 말하지 못하였으며 기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으니 그 행실과 몸가짐의 확고함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달랐다.
또 조정에서 응대(應待)하는 재능이 있어서 중국 사신(使臣)이 올 때마다 반드시 공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다. 3년간 병석에 있을 때 태조가 의원을 보내 문안함이 끊이지 않았으나 아깝게도 수(壽) 50으로 큰 뜻을 못 편채 충정(忠靖)의 시호와 부조의 은전을 받고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위화도 회군〕

고려는 명(明)의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는 위협에 급기야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1388년(우왕 14) 5월 군사를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진주(進駐)시켰다. 이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는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왕에게 상소하였으나 최영(崔瑩) 등의 반대로 받아 들여지지 않아 부득이 출정한 것이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不可論)은 첫째 소국이 대국을 침이요. 둘째 여름철 농번기를 택함이요. 셋째 거국적 원정의 틈을 타 왜구의 침입이 우려됨이요. 넷째 시기가 무더운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군대내에 질병이 심할 것이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출정은 그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때마침 5월에 위화도에 진주하자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병졸 중에 환자가 발생하여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하여 회군을 청하였으나 평양에 있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려 5월 20일 개경을 공격하고 최영은 고양으로 귀양보내고 왕은 강화로 추방하였다.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조선(朝鮮) 왕조 창건의 기초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우리 문중에서는 양렬공 인벽(仁璧), 충정공 인옥(仁沃) 형제분은 회군에 찬동하고 검한성공 인규(仁珪)와 좌중군(左中軍)으로 위화도까지 출정하였던 그 아들 부사공 순(純)은 회군 불가론을 개진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다가 함안(咸安)에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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